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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산 해인사 자락 역사의 인물... 내암 정인홍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

-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선생의 생애

정인홍의 자는 덕원이요 호는 내암이며 본관은 서산이다. 서산 정씨는 고려의 멸망에 따라 낙남(落南)하여 김천 거창을 거쳐 증조부(曾祖父)이신 희(僖)는 영남 유종(儒宗) 점필재(?畢齋) 김종직의 문인으로 문과에 합격하여 삼가 현감을 지냈다. 이러한 집안에서 중종 31년(1536) 지금의 가야면 사촌리에서 아버지 윤(倫)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향촌의 구전에 의하면, 태어날 때 상왕산(象王山)에서 기이한 징조가 생겼으니 산의 풀과 나무가 3년 동안 모두 잎이 피어나지 않았다고 하며, 눈은 중동(重瞳)으로 별처럼 빛나 사람을 쏘아보면 압도하는 기세가 있어서 감히 마주서지 못하였다고 한다. 56세 때 이미 시(時)를 짓는 영특함을 보였다.

하루는 참새 새끼를 가지고 놀다가 내가 죽자 글을 지어 조상하기를 “새가 죽었는데 사람이 이를 곡한다는 것은 의(義)에 어긋나다네가 나 때문에 죽었기에 나는 너를 곡하노라”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祭鳥文 鳥死人哭 於義不可 汝由我而死 是而哭之) 이웃 쪽다리 마을 소학당(小學堂)과 해인사(海印寺) 등에서 글공부를 하였다. 이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11살 때, 해인사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마침 벼슬아치가 고을을 순시하느라 절에 들렸는바 선생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기특하게 여겨 운자(韻字)를 내어 글을 짓게 하니 곡 응하기를


“한자 남짓한 한 그루 소나무가 탑 서쪽에 있네
탑은 높고 소나무는 낮아 서로 가지런하지 않구나
오늘날 지금 소나무가 탑보다 낮음을 말하지 마시오
소나무가 자라난 다음날에는 탑이 되려 낮아지리니”

하였다. 이 글을 본 벼슬아치는 선생의 영특함에 반하여 사위를 삼기에 이르렀으니 판결사 양희(梁喜)이다.

15세에 삼가 토동(兎洞)으로 가서 남명 선생 문하에 들어간 선생은 23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니 과거(科擧)가 명리를 탐하는 것이라 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즉 도덕이나 학문 보다 문예에 치우치고, 실천이 수반되는 않는 학풍에 대해 개탄하는 한편, 이를 명분만을 쫒는 선비들의 풍습에서 연유하는 것이라 파악하여 배척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잘못된 사습(士習)과 학풍(學風)에 대해 이론적으로 비판하고 이를 경계할 것을 촉구하였다 결국 그는 실천(實踐)과 실용(實用)이 수반되지 않는 학문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여, 현실적인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문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선저 13년에는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곧 산림출신의 도학자로 언관(言官)의 책임을 맡은 것이다. 율곡 선생도 그의 문집에다 “정인홍은 맑은 이름으로 세상에 중망을 얻었는데 이 직책이 내려질 적에 사람들이 모두 그 풍채를 우러러 바라보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대단한 촉망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내암은 45세 장년의 나이로 조정의 인정을 받으며, 소신껏 책임을 완수하였다. 꺼리길 것 없이 간언(諫言)을 하여, 조정과 지방의 사령(使令),이서(吏胥)들이 벌벌 떨었다고 전해진다. 송강(松江) 정철(鄭撤)은 “덕원은 그 마음이 공정하다. 비록 나를 멀리 귀양보내고자 논한 사람이지만. 길에서 만나면 나는 그와 같이 술을 마시리라”고 하였다. 사관(士官)도 이때를 평하기를 “정인홍은 조식의 고제다. 어려서부터 임하에 글을 읽어 자못 기절도 자허했고, 영남선비들이 많이들 그를 추존하여 징하기를 내암 선생이라 했다. 불세의 은명을 입어 초야에서 일어남에 임금은 자리를 비우고 기다렸고, 온 세상은 눈을 씻고 그 풍채를 바라보았다.        ---- 중략 ---

인홍은 혹시라도 세상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러나 당쟁의 첨예화 속에 강직하고 과격한 정치적 논리로 물의가 일어나 이듬해 8월에 장령직에서 해직되어 귀향했다.


선조22년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나라가 위태롭고 백성이 어려움에 빠지자, 내암은 조정에 대한 서운함과 서인에 대한 증오를 접어두고,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창의(倡義) 항왜(抗倭)의 불구덩이에 뛰어들었다.

내암이 57세 때,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200년 간의 평화에 젖은 우리 조야의 무방비와 민심의 소요로, 관군은 바람만 불어도 크게 무너지고, 5월 2일 왜군이 20일만에 우리의 수도인 서울에 입성하였다. 이 때 내암은 도내 일대의 동문들과 평소 양성해 두었던 무하생들을 5월10일 지금의 가야면 숭산동(崇山洞)에 모아 대대적으로 궐기했다. 이들은 내암 휘하뿐만 아니라, 이웃 의병군단에서도 핵심적인 구실을 다해 활동하였다.

본진(本陳)을 야로의 주학정(住鶴亭)에다 구고, 군세는 합천,초계,삼가,고령,성주 등의 군사를 합쳐, 정병 수백과 창병 수천의 합계 3000명에 달했다.
내암의 진두지휘 하에 출격하여, 무계진,안억역,마진 등지에서 적국을 공격 섬멸하고 낙동감의 적 보급로를 차단하였으며, 적의 거점인 성주성(星州成),개령성(開寧成)을 포위 공격하여 수복하는 등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당시 이른바 영남3대 의병장으로 이름난 의병장들이 모두 남명 조식 선생의 문하생인 우도의 의병장임을 봐서 실천유학을 신봉하는 [남명학]의 진수를 알 수 있다.

정유재란(1597)으로 왜구가 재침했을 때, 전국적으로 창의 전무했음에도 내암의 지휘로 우리 합천 일대와 성주,고령 5읍은 결연히 창의하여, 명군을 도와 왜적을 몰아내고 맑게 소탕하는데 전공을 세웠다
전란이 종식된 다음 명군에 의해 최고 수훈자로 천거되었다. 무엇보다 오늘날 세계 문화유산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해인사와 팔만대장경판을 전화속에서 지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합천의병장의 공로다. 이지관(李智冠) 스님이 저술한『해인사사지(海印寺寺誌)』에 [호법신장(護法神將)]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 정유재란의 ]

내암선생은 전란 후 여러 요직을 모두 사양하였으나 선조 35년(1602)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 되어 부임하니 임금이 “경이 지금 올라오니 창생의 복이다. 사양하지 말고 더욱 국사에 마음을 다하라”고 하였다. 기축옥사를 주도한 서인과 방관한 남인을 정국에서 배제하려고 시도한 마지막 실질적인 재관시기 라고 할 수 있다.

선조 40년(1607) 5월에 [기축옥사]의 연루자 중에서 억울한 자들을 참작하여 신원 하라는 왕명이 내리고, 남계(藍溪),덕산(德山),향천(香川) 3서원장이 됨으로서 우도 사림의 종장 위치가 확고히 구축되었다. 이듬해 정월에 광해군의 저위(儲位) 문제로 [청참 유여경(請斬 柳永慶)] 상정으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연변으로 귀양가는 도중 선조의 급서로 풀려나, 한성부 판윤,사헌부 대사헌 등 중책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합천으로 귀향한다.

광해조 4년(1612) 77세에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고 서령부원군(壻寧府院君)에 책봉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이듬해 5년 3월에 [정운공신 1등]에 책봉되고, 6월, 10월 3차에 걸쳐 [영창대군 신구소 : 永昌大君 伸救蔬] 올려 영창대군 처단의 불가함을 아뢴다. 동왕 6년 정월에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나 곧 차자를 올려 사직한다. 동왕 7년 10월에 상경하여 왕과 3차 직대 하면서 구황책(救荒策)을 건의하여 실행케 한다. 12월에 궤장(?杖)을 하사 받는다.

동왕 9년 11월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의가 일어나자 의정부에 글을 보내 반대의사를 밝혔다. 도당의 질의에 대해 “포황무외함은 인군의 대도이다. 군신 자모의 명분과 의리는 천성에서 나와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包荒蕪外 人君大道 君臣子母名義 出於天而不可易).라고 답서를 올려 반대하고 귀향을 했다. 이로부터 죽을 때까지 9년 동안 도성(都城)에 발을 들려놓지 아니하였다.

인조 원년(1623)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다. 서인 김자점(金自點),이귀(李貴),김유(金?) 등이 주도했다. 내암은 폐모론을 주도했다는 날조된 죄명을 쓰고, 도성으로 압송 된지 5일 만인 4월 3일 복주 되어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시신은 문인 정온(鄭蘊)이 남명 선생의 중자 조차마(曺次磨)와 상의하여, 역경을 헤치고 운구해와 상각사촌 선영 상위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감에 반대당들의 악의적인 왜곡으로 전문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은 선생이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화수로 보는 설화에 현혹되고, 신원(伸寃)를 받았음에도 위민사상과 청렴으로 일관했다. 온갖 중상과 모함을 서슴지 않았던 정적들도 내암이 축재했다는 말은 일체 없다.

이른바 [인조반정] 이후부터 조선조의 유교적인 폐단은 모든 것을 수평적인 것에서부터 수직적으로 경직시켰다. 학문은 형식화되고, 이론은 획일화되어 유일사상으로 굳어져버렸다. 후일 조선조에 나타난 모든 병폐는 이미 인조반정을 계기로 추락화(墜落化)되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 이 글은 중고등학교 충효교육용 교재로 작성한 것임
  ☞ 더욱 자세한 문헌은 합천군 창의기념관이나, 합천군 홍보실에 방문하시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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